그리고 모로코로 떠났다 모로코

[붉은 별 제국이 떠오르는 것은 나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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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30일.

영국에 도착한지 만으로 하루. 런던 시내를 구경한 것은 반나절. 그나마 대충 겉핥기로 중심부만 잠깐 둘러본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모로코로 떠난다.

원래는 이런 사연이 있다. 한국에서 영국행 티켓을 끊고 비행날짜까지 손가락을 꼽으면서 한참 인류 최후의 미스터리인 방구석을 탐험하는 와중 동호씨에게서 구글톡이 왔다.

동호씨: 뭐하냐ㅋㅋㅋㅋ
: 방구석 탐험ㅋㅋㅋㅋ
동호씨: 잉여킹ㅋㅋㅋㅋ
: 부정할 수 없다ㅋㅋㅋㅋ

대충 이런 내용의 품격높은 대화를 지속하다가 권유가 들어왔다.

동호씨: 지금 모로코 갈까 스페인 갈까 동전님에게 질문하려는 중이다
: 그런 문제를 고민할게 뭐가 있어
동호씨: 왜?
: 유럽권 나라는 언제나 갈 수 있지만 아프리카 대륙은 한국사람으로서 평생 언제 갈지 모르잖아?
동호씨: 그런가?
: 그렇지
동호씨: 같이갈래?
: 그럴까?

어차피 영국에 가면 유럽을 좀 헤집어 볼 요량이었으니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모로코, 모로코라잖은가. 가격 문제도 비행기값은 저가항공이라 별로 신경쓰이지 않을 정도고, 아프리카권 국가니까 무조건 쌀거라는 근거없는 믿음은 기폭제가 되어줬다. 즉석에서 합류하기로 결정하고 모든 결정권을 동호씨에게 넘겼다. 그리고 이 일은 까마득한 기억속으로 일단은 사라져 있었다.

영국에 상당히 지랄스러운 경험을 하며 도착한 다음 날, 그 클럽에서 “클럽은 춤추는 곳이지 자는 곳이 아니야” 라는 말을 들으며 기도에게 쫓겨난 그 날 아침, 함께 밖으로 나가는 도중 동호씨가 얘기했다.

동호씨: 내일 모로코 갈꺼니까 오늘 일찍 들어와


[ㅁ…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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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얼마쯤이라는 암시도 없이 당장 내일이 여행이 된 현실. 그런고로 대강 여행에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고서 새벽 1시 반에 집을 나섰다. 영국에 익숙해 지거나, 심지어 시차를 극복할 여유 따위조차 없었다.

반쯤 혼이 나간 상태로 비행기에 올랐다. 죽을듯 싶었다.

Tube에 관하여 영국

(본 이미지의 저작권은 본인에게 귀속됨)

런던의 특징을 말한다면 튜브를 빼놓을 수 없다. 튜브에 대해 대강 알아보도록 하자.


개략적인 역사:

1850년대 런던 시내 교통 포화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지하로 가는 기차’라는 컨셉으로 대두되어 1863년 해머스미스 앤 시티Hammersmith & City와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 선으로 세계 최초로 지하철이 개통됐다. 당시 최고축에 속하던 철도 엔지니어였던 James Henry Greathead의 아이디어를 도입해서 지하로 터널을 뚫을때의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했다던데, 과연 천재적인 사람은 머리가 비상하다는 사실을 그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다.

[그의 어깨 넓이와 머리 크기의 비례를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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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개통때부터 4만명이 넘는 인구가 이용했다고 하며, 계속되는 증축으로 현재 12개 노선이 운행중이다. 한국 지하철처럼 라인별로 특정 색이 있으니 알아보기 쉽다.


요금:

먼저 슬픈 소식 하나. 런던의 대중교통 요금은 2010년 1월 2일부로 전면 인상됐다. 왜 날짜를 기억하는가하면, 그 날이 바로 내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젠장.

현금으로 승차시 기본요금은 4파운드고, 오이스터 카드를 이용하면 2파운드이며, 구간과 이동거리에 따라 요금이 달라진다. 환승할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처럼 거리비례가 아니라 존Zone별로 요금이 책정되기 때문에 계산이 단순해져서 개인적인 느낌으로 가는 거리와 노선, 구간마다 요금을 계산하며 잔머리를 굴려야 하는 일본보다 낫다고 생각하지만, 가격의 측면에서 볼 때는 좀 꺼림칙한 감이 있다.

존별로 다른 요금이 책정되기 때문에 요금표를 잘 봐야 한다. 자세한 정보는 런던 교통국 홈페이지의 요금 항목(http://www.tfl.gov.uk/tickets/14416.aspx)을 참고하시라. 혼잡하고 주로 사람들이 이용하는 존 1을 포함하면 다소 비싸지지만, 존1을 제외하면 요금이 약간(50펜스 정도) 저렴해진다. 관광을 주요 목적으로 한다면 존 1-2를 주로 이용하게 된다. 그 외의 존으로 나갈 일이 있으면 기차표를 끊던가, 아니면 버스를 이용하는게 현명한 선택이다.

다른 참고사항으로는 오이스터 카드나 일종의 자유이용권인 트래블 카드를 이용할 때 적용되는 피크 타임이 있다. 오이스터를 쓸 때는 평일의 출퇴근시간인 06:30 ~ 09:30, 16:00 ~ 19:00 사이에는 1존에서 3존 이상의 장거리 구간에서만, 트래블 카드는 구간에 따라서 상당한 요금이 할인된다. 만약 오이스터를 쓰지 않고 트래블 카드를 사용할 심산이라면 피크 타임을 피해서 표를 사면 편하다.


혼잡도:


[살려줘]

(본 이미지의 저작권은 본인에게 귀속됨)

치안:

혼잡하다는 얘기를 하면 대충 짐작은 하겠지만, 으례 다른 관광지들이 그렇듯 런던의 튜브에도 소매치기가 꽤 많다. 한 번은 런던사람 친구와 지하철을 타며 지갑을 배낭에 넣어뒀는데, 친구가 소매치기를 당할 수 있다며 주의를 줬다.

나야 소매치기에 대해 담백한 편이기도 하고 별로 걱정 안하는 편이기도 하기에 계속 등 뒤에 지갑을 두고 다녔지만 한 번도 당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런던인이 주의를 줄 정도이니 약간 신경쓰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여담으로, 소매치기는 ‘나 관광객이요’ 하고 온 몸으로 외치는 사람들을 주로 노린다. 대표적인 예시라면 이동수단 안에서 엄청 흥분해버려서 마구 떠들며 셀카를 찍고 난리를 친다던가,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모든 사람은 적이라는 듯 사방팔방을 경계하는 눈초리로 두리번거리는 사람 정도가 있겠다. 어떤 도시던지 놀러가게 된다면 현지인 흉내를 내는게 가장 적절한 처신방법이다.


소리:

튜브 내부의 소음은 가히 살인적이다. 지상에서야 그냥저냥한 편이지만, 지하에서 운행되는 노선들의 경우에는 한국이나 일본, 혹은 뉴욕이나 마드리드와 같은 도시들에서 지하철을 타본 사람은 상상도 하지 못할 크기의 소음이 당신을 엄습한다. 대충 한국의 그것과 비교해보면 그랜저와 다마스만큼의 차이가 난다. 터널을 통과하는 도중에는 옆사람과 외침에 가까운 음량으로 대화를 시도해도 의사소통에 애로사항을 겪는다거나, 이어폰을 꽂았음에도 불구하고 음악이 잘 들리지 않는 정도라고 하면 대충 어느 정도인지 실감이 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엄청난 소음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타인에게 무심한 대도시 주민의 특성인지는 몰라도 런던 튜브 내에서 사람들은 의외로 조용한 면을 보인다. 아는 사람들끼리 타도 그냥 조용조용히(물론 씨끄럽기 때문에 이 조용히라는 단어에는 다소 편차가 있다) 얘기를 하거나, 아니면 신문이나 책을 보거나 멍을 가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술취한 청년들은 전 세계 어디서든지 예외다.


승차감:

소리와 마찬가지로 이도 한국과 일본 등지의 그것과 비교해봤을 때 다마스와 그랜저만큼의 차이가 있다. 차량 설계할 때 서스펜션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지 덜컹거림이 상당한 편으로, 웬만큼 타고 다니면 한국이나 일본 지하철의 미끄러지는듯한 승차감이 약간 그리울 것이다. 그래도 웬만큼 신경이 가는 분들이 아니라면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이다.

덜컹거림과는 별개로 튜브 탑승의 즐거움을 더해주는 요소도 있다. 운전기사 분들의 개성이 그것인데, 요즘은 어떨지 모르지만 최소한 2009년과 2010년 초의 튜브 운전사분들은 운전 실력을 통해 자신들의 특징을 뽐내곤 했다. …물론 문자 그대로 읽으시면 곤란하다.
간혹 급브레이크를 밟는 분도 있고, 역을 20m쯤 지나갔다가 후진하시는 분들도 있으며, 역 10m 앞에서 일단 멈춘 다음 서행으로 슬슬슬 구내에 진입하는 분들도 있다. 가끔 리듬감있는 브레이크로 역에 들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안내방송 외의 수단으로 승객에게 알리는 경우도 있다.


그 외의 특징:


한국인들은 놀라 자빠질지도 모르는 사실…이라고 하면 오바고, 이곳만의 특징인지 아니면 간혹 그런 나라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튜브가 지하에 있을 때는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다. 튜브 역 구내에도 전파 중계기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 통화나 Wifi가 불가능하다. 지하철에서 통화하지 않는게 일종의 에티켓으로 자리잡은 일본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조용한 지하철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여기에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영국에 사시는 아는 형님이 한국에 있는 여자친구와 장거리 연애중인데, 간간히 통화를 하다가 튜브를 탈 일이 있으면 “나 지금 지하철 타니까 있다가 전화할께” 하며 전화를 끊으셨단다. 그런데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하자 이를 수상하게 여긴 여자친구분의 의심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폭발하셔서 싸우셨다는 것. 겨우 설명을 하여 오해를 풀었다는데, 여자친구분이 직접 런던에 방문하기 전까지 그녀는 사실상 이 사실을 납득하지 못했다고 한다. 런던에 남자친구나 여자친구를 보낸 사람들은 이를 알아두어 혹시 발생할지도 모르는 연애전선의 불미스러운 사고를 방지하도록 하자.

오래되서인지, 아니면 별 다른 이유가 있는것인지는 몰라도 튜브는 보수공사가 엄청 잦다. 오죽하면 튜브는 1년 내내 공사중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인기노선 비인기노선을 안가리고 사시사철 진행중이며, 이용객이 가장 많을 시간에도 보수공사를 하는 경우가 흔하다. 공사중이라고 해서 전체 노선을 폐쇄하는 경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사중인 구간만 폐쇄하는 경우가 잦기 때문에 특히 일반적으로 이용빈도가 잦은 피카딜리Piccadilly 선이나 빅토리아Victoria 선, 쥬빌리Jubilee 라인에서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이 공사중일 때는 돌아버리는 것이 느껴진다. 일반적으로 튜브를 타겠다고 결심한 경우는 시간에 쫓길때가 대부분이기 때문이지.

불행인지 다행인지 런던 교통국 홈페이지(http://www.tfl.gov.uk)에는 1년 중의 보수일정이 망라되어 있으며, 현재 노선의 어느 부분이 보수중인가에 대한 정보도 실시간으로 제공된다. 역 안이나 입구에도 커다란 패널에 공사중인 구간이 어디인가 적혀있으니 주의깊게 살펴서 괜히 돈낭비 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나는 어디에 있는거니 영국

[드디어 런던 시내를 헤집을 시간이 왔다]
(본 사진의 저작권은 본인에게 귀속됨)

영국에 오기 전 숙소에 대해 두 가지 계획을 세웠다. 첫번째는 숙소를 구하기 전까지 나를 영국으로 날아오게 한 장본인이 현재 살고 있는 곳에 더부살이 하는 것이요, 두번째는 만약 그 장본인과 연락이 두절되었을 시 영국에 같은 날 도착하는 나의 친구 대영씨가 묶기로 한 민박집에 달려가는 것이다.
여권에 도장도 박았겠다, 부족한 니코틴도 충족했겠다, 이제 남은 것은 혹시나 실행해야 할지도 모를 플랜B를 위해 이 히스로 공항 3번 터미널의 별다방에서 친구 대영씨를 만나는 것 뿐이었다.

여기 처음 히스로 공항에 오는 모든 분들이 알아두어야 할 정보가 있다. 히스로 공항 3번 터미널에는 스타벅스가 없다. 5번 터미널은 가보지 못하여 히스로 자체에 스타벅스가 없다고 말 할 수는 없지만, 본인의 경험으로 2010년 현재까지는 1번, 2번, 3번, 4번 터미널에는 스타벅스가 확실히 없다. 이 말인 즉슨, 나는 한 시간 동안 있지도 않은 스타벅스를 찾기 위해 별로 넓지도 않은 3번 터미널 내부를 빙빙 돌아다녔다는 얘기다. 참고로 히스로 3번 터미널에 있는 적절한 만남 장소로는 카페 네로Cafe Nero나 프레따망거Pret a Manger 정도가 있다. 네로같은 경우는 3번 터미널 입국소 출구에서 밖으로 나가는 위치에 바로 있으니 누군가를 만난다면 가장 적절하다 할 수 있다.
결국 포기했다. 입국 심사대에서 엇갈린지 시간도 꽤나 많이 흘렀고, 그래서 나조차도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대영씨가 차라리 숙소에 들어가서 쉬고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5시간이나 기다렸으면 정말 미안하니까. 그래서 일단 영국에 미리 살고 있던 지인의 친구분에게 전화를 해보기로 했다. 지인에게 바로 하지 않은 이유는, 그는 지금 이 시간에 크로아티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연락이 될 턱이 있나.

[3번 터미널에 스타벅스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내 뒤에 Cafe Nero가 있었을 뿐]
(본 사진의 저작권은 본인에게 귀속됨)

공중전화 기본 사용료가 40펜스라는 사실은 공중전화에 돈을 넣는 손을 떨게 하기 충분했지만(1파운드 2,000원으로 계산하면 40펜스는 800원이다. 한국은 2009년에 70원이었지 아마?),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몇 번의 실패 끝에 연결음이 가고 부산 사투리를 쓰시는 친구분께서 전화를 받으셨다. 엘레펀트 앤 캐슬Elephant & Castle 역으로 와서 전화하라고 하시는군. 일단 가기로 했다.

[이제부터 떠나야 했던 나의 여정]
(출처: 런던 교통국 http://www.tfl.gov.uk)


[엄청 흥분했다]
(본 사진의 저작권은 본인에게 귀속됨)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영국의 지하철은 Tube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세계 최초라는 점과 건설 당시 사용하던 선로와 터널을 소정의 리모델링 후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더럽다는 점에서 정말 유명하다. 그래서 상당한 기대감을 지니고 있던 나는 저 멀리 튜브의 입구가 보일 떄 나는 흥분하고 말았다. 그리고 30분을 기다려서 산 신기한 종이티켓을 처음 보는 개찰구에 찍고 들어가 튜브를 탈 때까지 계속 흥분상태였다. 이국의 교통수단을 처음 이용할 때의 그 흥분은 겪어본 사람만 안다. 적어도 외형적인 신비감이 가시고 결국 이건 좀 더 빨리 이동하기 위한 동일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이성적인 통찰을 되찾을 때 까지는 대중교통 이용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이런 흥분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심지어 지하철을 4파운드, 그러니까 한화 8,000원 가량을 주고 탔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들 정도다.
과연 영국의 튜브는 명불허전. 이름에 걸맞게 동그란 차체, 게다가 내부마저 둥글다. 그 내부는 너무 좁아 사람이 설 공간조차 없어보인다. 이렇게 생겨도 탈 사람들은 다 알아서 타더라. 왠지 출퇴근시간대는 한국의 지옥철을 능가하는 광경이 벌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군.(이 느낌은 후일 사실로 밝혀졌다. 죽는 줄 알았다.)

[이어폰이 없었다면 분명 120%의 확률로 귀가 멀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본 사진의 저작권은 본인에게 귀속됨)

지하철 노선도 보는 법은 일본을 제외하면 비슷한지라 목적지까지 도착하는데는 별 무리가 없었다. 어, 도중 차링 크로스Charing Cross 역에서 괴랄한 장면을 목격한 것 외에는 없었다.
엘레펀트 앤 캐슬 역이 있는곳은 베이커루Bakerloo 선이라 갈아타기 위해서는 2번 환승을 해야했기에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하느라 꽤나 지쳐 있어서 차링 크로스 역에서 퍼져 있을 무렵이었다. 기진맥진하여 몸을 짐에 기대고 한숨 돌리고 있는데 저쪽에 연미복을 입은 청년 무리가 보였다. 명색이 금요일 밤이라 테마 파티라도 가는 모양이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담배를 꺼내 무는게 아닌가. 얼굴을 보니 불그죽죽한 것이 다소 취해있는 듯 했다.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들은 왁자지껄 떠들며 여유롭게 담배를 피더니 열차가 오자 여유롭게 선로에 담배를 던져넣고 유유히 열차에 올랐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영국은 공공장소에서는 금연이다. 이를 어기면 1,000파운드라는 웃어넘길 수 없는 막대한 금액의 범칙금을 물어야 하는데, 참으로 담대한 청년들이라 할 수 있다. 사실 그 때는 이를 알기 전이라 영국은 지하철에서 담배를 펴도 괜찮은 줄 알았고, 그 장면이 너무도 신기했기에 사진을 찍어두려 했지만 짐을 옮기느라 너무나도 피곤했기에 카메라를 꺼내지 않고, 내가 그 막대한 짐을 들고 타기에는 너무나도 만차였던 열차를 떠나보낸 뒤에야 여유를 찾고 카메라를 들어 그냥 역 내부만 찍었다. 절대로 그들에게 너 사진 왜 찍냐고 두들겨 맞을 것을 두려워 해서가 아니다.

[난 그냥 역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찍고 싶었을 뿐이다. 진심으로]
(본 사진의 저작권은 본인에게 귀속됨)

여하튼 짐이 무거운 것을 빼면 별 어려움 없이 엘레펀트 앤 캐슬에 도착하여 밖으로 올라와 그 지인의 친구분께 전화를 하기 위해 공중전화로 갔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개찰구를 빠져나오니 바로 공중전화가 있더라. 나는 여유롭게 전화번호를 적어놓은 수첩을 꺼내들고, 아까 공항에서 음료수를 사먹느라 펜스를 다 썼기에 피흘리는 심정으로 1파운드 동전을 꺼내들어 전화기에 넣고 다이얼을 돌….

신호가 안간다.

뭔가 이상하다. 일단 수화기를 다시 걸었다. 영국이나 한국이나 공중전화기에 돈넣고 전화 걸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수화기를 걸면 돈이 반환되는건 마찬가지겠지. 이건 전세계 공통 법칙이다. 그런데 안나온다.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생각은 동전이 위쪽에 걸려 있어서 돈 카운트가 되지 않았고, 따라서 뭔가 무거운 물체를 더 넣으면 무게에 밀려 동전 두 개가 모두 안에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1파운드 동전 하나를 더 넣어보기로 했다. 투입구로 사라지는 동전을 보며 자 이제 됬겠지 하고 액정을 보니 여전히 ‘돈을 넣어주세요’ 다. “이게 왜이러지 하하하하” 라는 표정으로 전화기를 흔들어보기도 하고 한국에서 자판기가 묵묵부답일 때 으례 그러하듯 손바닥으로 탕탕 쳐보기도 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아하하하하하~ 이러면 안되는데~ 왜이러니~ 아하하하하하~]
(출처: Google Image Search)

공중전화 부스는 2개가 붙어있는거라 옆 전화기에도 1파운드 동전을 넣어봤다. 얘도 마찬가지다.
당장 부스에서 뛰쳐나와 바로 앞 역으로 달려들어가 역무원에게 질문을 했다.

: 공중전화가 돈을 먹었어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역무원: 몰라염.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봤다. 몇 명에게 시도해 보았지만 다들 무시하고 지나간다. 과연, 눈 앞에서 사람이 죽어 자빠져도 자기 갈 길을 간다는 영국인들 답다. 겨우 한 흑인을 붙잡아 하소연을 하니 마지못한 것이 역력한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70펜스 가량을 꺼내주며 다시 한 번 해보라는 대답을 해준다. 그래, 50펜스도 1파운드 동전에 못지 않게 무거우니 이번에야말로 내려갈거야, 하고 되뇌이며 내 2파운드를 머금고 있는 전화기로 달려가 동전을 넣었ㄷ….

[킥!]

(출처: Google Image Search)

죽어! 죽어! 죽어!!
가뜩이나 30kg에 달하는 짐을 들고 지하철의 막대한 계단을 오르내리느라 짜증이 나 있는 상태였다. 잔의 물을 넘치게 하는 것은 마지막 한 방울인 법이다. 이성의 끈이 날아갔다. 나는 공중전화에게 온갖 욕설과 린치를 감행함으로써 런던 시민들에게 저 공중전화가 살아 움직여 저 동양인이 보는 앞에서 그의 부모를 살해하고 누이를 능욕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망상의 빌미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날아차기를 감행하는 도중 공중에 떠있는 동안 옆에서 누가 “어이 친구, 진정하시지Oh my god dude, cool down”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고, 공중전화를 가격함으로써 부스가 잠시 기울었던 것을 넘어가지 않도록 다시 잡아 제자리시킨 뒤 고개를 홱 돌려 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았다. 동네 노는 형 같은 분위기의 두 사람이었는데, 시기적절한 농담이었기에 난 그냥 씨익 웃어줬을 뿐인데 갑자기 껄렁껄렁하던 그 둘은 경건한 자세를 취하더니 급한 일이 생각난듯 서둘러 길을 갔다. 의아해하며 다시 고개를 돌리는데 공중전화 부스 유리에 내 모습이 언뜻 비쳤다. 웬 악귀나찰이 핏발 선 눈으로 살기등등하게 웃고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짐 위에 앉아 담배를 한 대 폈다.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지하철 출구 근처였지만, 나를 중심으로 반경 3미터 이내에는 아무도 다가오지 않아서 비교적 편하게 쉴 수 있었다. 짐을 끌고 주변을 돌아다녀봤지만 공중전화는 저 길 건너편에 있는 것 말고는 보이지 않는다. 맨몸으로라면 모를까, 이런 짐을 가지고 한가운데 구분 펜스까지 쳐져있는 6차선 도로를 무단횡단하는 것은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1km 가량을 빙 돌아서 공중전화 앞으로 갔다.

다시 내 분노를 표출할 필요가 없게 되어 다행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 일단 보이스 메일을 남겼다. 60펜스. 10분 뒤에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었다. 역시 받지 않는다. 또 60펜스. 이쯤이면 확인을 하고 전화를 되걸어주지 않을까 싶은 시점이 지나서 다시 한 번 전화를 했다. 다시 60펜스. 전화를 받지 않는다.

밤 11시 반이다. 일단 자야할 것인데 잘 곳이 없어졌다. 여행은 임기응변이라는 마인드로 침착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짐을 뒤져 유학기간동안 여행다닐 때를 대비해 참고용으로 산 여행 안내책자를 꺼내들어 숙박할만한 곳을 찾아봤다. 여기가 Elephant & Castle 이니까, 엘…엘…엘…. 없다. 사실 Elephant & Castle은 주변이 거의 일반 주택가이고, 비지니스와는 약간 거리가 있는데다가 관광과는 담을 쌓은 곳이라 숙박업소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이 근처에 숙소가 없음을 확인하고 다른 곳에 묵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런던에 처음 떨어진데다가 지도도 뭣도 하나도 없는 상태라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튜브마저 거의 끊길 시간이다.

약간 번외적이지만 한 마디 해야겠다. 이 때 내가 참고했던 여행 안내책자는 악명높은 Just go 시리즈의 영국편이다. 웬만하면 이건 사지 않으려고 했는데 영국을 안내한 책자가 거의 없어서 결국 살 수 밖에 없었다(신발끈 여행사에 직접 문의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 심지어 론리 플래닛 한국어판도 영국편이 없었다. 세계로 간다 시리즈도 마찬가지고. 한마디로 영국 관련 여행책자가 씨가 말랐다는 이야기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최소한 2009년 당시에는 그랬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Just go 시리즈가 욕을 먹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다른 분들이 주로 지적하시는 기존 여행책자의 내용과 온라인 자료들의 짜깁기라는 점에 있어서는, 솔직히 나는 그러려니 한다. 관광명소나 이런 것들은 어차피 하나의 사실을 두고 설명하는 것이니 어떤 글을 보든 거기서 거기 아니겠는가.
하지만 정말 못참겠는 것은, 책 표지에서부터 ‘배낭여행자를 위한 동반자’ 어쩌고 해놓고서 숙박 칼럼에는 가증스럽게도 민박, 하다못해 호스텔조차 소개를 해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잘 기억은 안나지만 분류는 대충 럭셔리, 프리미엄, 이코노미 뭐 이런 식이었고, 이코노미에 소개된 숙박업소들의 평균적인 가격은 1박에 100파운드 정도였다. 단적인 예로, 이비스Ibis 호텔이 이코노미 칼럼에 속해 있었다. 말 다했지. 물론 릿츠 칼튼이나 매리엇 같은 호텔에 비하면 이코노미로 칠 수도 있겠지만…. 이봐요. 벤츠하고 에쿠스 사이에 그랜져가 있다고 해서 그랜져가 마티즈와 같은 급이 되는건 아니잖소? 여기에 더해 주소만 덩그러니 나와있고 찾아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배낭여행자를 위한다는 주제에 지금 택시를 타라는거요?
단적으로 평하건데, Just go 시리즈는 정말 성의없게 만들어졌을 뿐더러 배낭여행에는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혹시나 여행책자가 필요한 분이 있다면, 아무리 거지같은 장소도 Magnificent와 Fantastic으로 도배해버린다는 특징에도 불구하고 론리 플래닛 시리즈가 절대적으로 낫다. 뭐 어딜 가든 거기에 대해서 느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를 뿐이고, 최소한 론리 플래닛 시리즈는 배낭여행자를 위해 노력한 티는 나니까.

[뭐 누구에겐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단언컨대 별로다]
(출처: Google Image Search)

이제 곧 6월이지만 런던의 날씨는 아직 쌀쌀해서 반팔 티만 입은 팔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 정도 날씨면 노숙을 할 정도는 된다. 가방에서 옷을 좀 꺼내 입으면 충분히 버틸 수 있다. 이민자 가방은 무거운데다가 옷가지와 사소한 가전제품 정도밖에 들어있지 않으니 그냥 옆에 두면 되겠고, 카메라 가방은 앞을 자물쇠로 잠궈서 몸통에 감고 자면 되겠다. 랩탑과 여권, 지갑 및 서류 등 여행의 핵심적인 물건이 죄다 들어있는 배낭은 역시 자물쇠로 잠그고 한쪽 팔을 어깨걸이에 껴둔 상태에서 베개삼아 벤다면 누가 건드리면 바로 알아챌 수 있을것이다. 일단은 피곤하니 한 잠 자고서 아침에 다시 생각해 보는게 최선일 듯 하다. 일단 마지막으로 전화를 해 보고 나서.

거의 노숙을 확정지은 상태에서 이번에는 지인의 친구분이 아니라 지인의 휴대폰에 직접 전화했다. 희망을 버리니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외국에서 노숙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일 것이다. 남들에게 얘기할 수 있는 추억담이 하나 생긴다고 생각하면 되겠지. 게다가 남들은 다 와보고 싶어서 부러워하는 런던인데, 이 얼마나 낭만적인 일인ㄱ….

지인: 여보세요?

: 씨발 형 살려줘!


살았다! 노숙 안해도 된다! 잘 곳이 생겼다! 낭만은 무슨 좃까고 있네!

노숙하다 부랑자한테 칼맞을 일 있냐? 난 침대에서 잘꺼야! 런던에 왔단말야!

도시에서 노숙이 뭐야 말도안돼!

그 대부분이 하소연으로 점철된 긴 통화 후 10분 뒤 저 멀리서 내 눈에 비치기를 그 찬란하기가 아폴로의 태양마차에 이르고도 남을 혼다 시빅 한 대가 다가왔다. 내 지인, 온 몸의 뼈가 사리로 변하고야 말 인생을 살게 되는 저주를 걸고싶었던 내 지인,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후광이 너무나도 찬란하여 이 사람은 신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반갑게 느껴지는 내 지인 동호씨가 그의 친구들과 함께 차에 타고 있었다. 진심으로 외치고 싶었다. 신이시여. 당신은 존재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나는 입국 심사대에서부터 10시간에 걸쳐 런던에 도착했다. 그 이후의 일은 별 것 없다. 그 날 알고보니 이 사람들은 클럽에 가기로 되어 있어서, 어차피 다 같이 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인사도 할 겸 잠시 집에 들러 짐을 두고 그 무리와 함께 클럽에 갔다가, 데킬라 2잔을 마시고 너무나도 피곤하여 잠시 소파에서 쉬고있는 것을 취해서 몸을 못가누는 것으로 오인받아 덩치가 산만한 흑인 기도에게 떠밀려 나온 것 정도다. 돈 내고 클럽에 들어가서 2시간만에 자지도 않았는데 쫓겨 나왔다. 외국에서 처음 간 클럽인데.

아무려면 어떠리. 잘 곳이 생겼는데.

그냥 들여보내주면 안되겠니 영국

[일반적으로 가장 설레이고 있을 무렵]
(본 사진의 저작권은 본인에게 귀속됨)

다른 나라로 향하는 길이 설레이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입국 심사에서 탈락하여 입국을 거부당한다면? 보통 관광객은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진다.

입국 심사에서 탈락의 문턱까지 갔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과 서스펜스로 가득한 체험담이 여기있다.

>> 그 기나긴 우여곡절에 대한 이야기(펼치기)

내가 영국으로 간 까닭 영국

[이제는 상처뿐인 영광이지만]
(출처: Google Image Search)

비자 문제부터 들어가야 비로소 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영국을 가고자 한 것에 별로 거창한 이유는 없다. 더 늦기전에 어학연수나 한 번 갔다올까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다가, 마침 그 때 영국에 가 있었던 지인에게서 이메일을 받고 그의 별로 세련되지 못한 꼬드김에 확 불이 붙은 것 뿐이었다.
생각해보라. 호주? 영국의 식민지였다. 미국? 영국 청교도들의 도피처였을 뿐이다. 기왕 어학연수를 갈 것이라면 그 언어의 종주국이자 발원지로 가는 것이 멋지지 않겠는가. 영국에는 옥스포드 악센트와 코크니가 있단 말이다. 더불어 영문학도이기도 한 내 상황으로 미루어보아 셰익스피어와 말로우, 윌리엄과 헨리 8세의 흔적이 고스라히 남아있는 이 나라가 매우 매력적으로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인턴쉽 지원이 실패한 것도 꼽을 수 있겠다. 영국계 금융그룹인 Lloyd에 인턴을 지원했었는데, 답변을 한 줄로 줄이자면 ‘너님이 영국 안살아서 쏘리염’ 이었다. 이 답변을 받아들고는 분기탱전하여 당장 영국으로 넘어가기로 결심했다.
뭐 이런 사소한 것들이 이유였다.

하지만 비자 문제가 발을 잡을 줄은 몰랐다. 뭐, 급히 준비하다보니 28일간 영국 체류비용 전액을 통장에 묵혀둬야 한다던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은 물론 내 잘못이다. 그래도 그걸 제외한 각종 서류들, 그러니까 부모님 통장이나 재학증명서, 어학원 등록금 완납 증서 및 입학허가서를 위시한 기타 내가 영국에 대한 불법이민을 추진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서류들을 굉장히 열심히 준비한 입장으로서는 약간 억울함이 있다. 관광객에 대해서 6개월간 무비자 체류조약을 체결한 국가끼리 이렇게 매정하게 할 수가 있을까 싶은데. 솔직히 불법이민을 추진하려 한다면 관광객으로 입국한 다음 잠적해 버리는게 더 쉽지 않겠는가. 쓸데없이 머리 굴려서 학생비자를 받는 것 보다야.
이 당시에는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후일 듣기로 영국 정부에서는 아시아 인들을 잠재적인 불법이민자로 보고 있다고 한다. 공개적으로야 부인받을 수 밖에 없는 차별적 발언이지만, 그네들 인식이 이렇다니 어쩌겠는가. 실제로 인도-아랍계에 이어 불법이민 2위를 달리고 있다하니.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비자는 발급받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서 뇌내 난방장치를 풀가동시킨 것은 비자를 못받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비자 발급 절차의 문제였다.
영국은 200x년부터 대한민국에서의 비자발급 업무를 전면중단하고 관련 업무 전권을 마닐라 대사관으로 이전했다. 정확한 연도는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 2005년인가 2004년인가 그러할 것이다. 대사관에서 가장 일상적으로 처리하는 문제가 비자관련 업무일터인데, 이 덕분에 비자 발급기간이 비슷한 외교레벨 국가들에 비해 두 배 가량 연장됐다. 난 대한민국 주재 대사에게 비자 발급을 거부당한 것이 아니라, 이 나라와 손톱만큼의 연관성도 없는 필리핀 소재 영국 대사관의 대사도 아닌 주재원에게 비자 발급을 거부당했다. 여기에 대해 클레임을 걸고자 하면, 서구인들의 알 수 없는 사고방식에 의해 우편으로 민원신청을 해야하므로 한 달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해당 업무도 대사관에서 직접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신청하기 위해서는 영국에서 지정한 비자발급 대행업체인 VFS를 통해야 한다.

결정적으로 내 뇌가 익기 직전까지 간 것은 비자심사 신청비용이다. 내가 비자심사를 신청한 것은 2009년 4월인데, 이 당시 환율은 1,900원대에서 약간 윗선에 있었다. 그런데 비자심사 신청비용 고시환율은 3월달 기준, 그러니까 2,200원대를 기준으로 하고 있었다. 신청비용이 거의 200파운드였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는 꽤나 많은 차액이 발생했으며, 따라서 이에 대해 직원에게 문의했더니 고시환율 기준은 대사관에서 방침으로 내려온다 하였다. 해당 국가의 화폐를 기준으로 하는 것은 물론 이해할 수 있는 처사이지만, 그렇다면 시장 변동환율을 정확히 적용해야 할 것 아닌가? 이건 완전 도둑놈 심보 아닌가. 하다못해 이 직원의 태도가 조금이라도 친절했으면 그렇게까지 분노하지는 않았을텐데, 직원은 마치 내가 죄인이라도 된 양 오만하기 짝이없는 태도로 핀잔을 줬다. 이 사람아. 자네는 실권자가 아니고 영국인은 더더욱 아닌 현지고용인일 뿐인데 그렇게 목에 힘을 주는 이유가 도대체 뭔가? 영국 대사관 관련 업체에서 일하다 보니 감투라도 쓴 기분인가보지? 물론 사람 상대하는 직업이 피곤한 일임은 알겠네만, 서비스 직종에서 일하는 사람이 그러면 못쓸 것 같은데.
그 직원에게 대사관에 직접 문의하라는 얘기를 듣고(그 대사를 그대로 옮기자면 “아 저희는 그런거 모르겠고 관련도 없으니까 대사관에 직접 문의하시던가 하세요.” 였다) 결국 격분한 나는 영국 대사에게 A4 5장에 달하는 장문의 편지를 써서 온라인으로 접수했다. 전달되었는지는 관련 부서 인력만 알고 있으리라. 그 이후로 비자 발급 신청 할 일도 없고, 관련 홈페이지에 접속할 일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전 세계 어느 관공서에서든 그러하듯, 이 일이 신속히 처리되거나 심지어 대사가 내 편지를 받아봤는가에 대해서도 별로 희망을 갖고 있지는 않다.
젠장.

[당시 나의 모든 심정을 대변하는 단 한장의 사진]
(출처: Google Image Search)

여하튼 신청한 뒤 한 달 뒤에 그 마닐라 대사관의 비자 발급 거부 도장이 찍힌 서류를 받아들고서는 분기탱전해서 바로 영국으로의 진출을 감행했다. 항공권도 비교적 저렴하게 구매했고,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짐을 꾸리는 데도 별 문제가 없었다.
그리하여 2009년 5월 29일 새벽 5시 반, 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인천 공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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